AI가 헌책을 쓸어 담는다: 학습 데이터가 만든 중고 서적 호황, 그리고 파쇄되는 책들
전 세계 독립 서점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대량 주문이 몰리고 있다. 주제도 시대도 제각각인 수천 권 단위의 구매, 히스로 공항 인근 물류창고로 향하는 배송지. 서점들은 구매자가 AI 기업이라고 의심한다. 2025년 미국 법원 판결이 이 시장을 열었고, 그 대가로 책은 제본이 뜯긴 채 스캔되고 폐기된다.
최근 몇 달 사이, 중고 서적 시장에서 설명하기 어려운 일이 벌어지고 있다. 영국 노섬벌랜드의 중고 서점 바터 북스(Barter Books)의 공동 대표 스튜어트 맨리는 평소 일주일에 2000~3000권을 판매한다. 그런데 최근 캐나다의 한 기업이 낸 단 한 건의 대량 주문이, 그가 일주일 동안 파는 물량과 맞먹었다. 30년간 이 업계에 있었지만 이런 일은 처음이라고 그는 말한다.
맨리만의 경험이 아니다. 영국과 아일랜드는 물론 미국, 캐나다, 유럽 대륙, 호주의 서점들이 비슷한 주문을 보고하고 있다. 공통점은 주문의 형태다. 보통 책 주문은 스포츠나 자동차처럼 하나의 주제로 묶이는데, 이번 주문들에는 그런 일관성이 전혀 없다. 최근 한 건에는 존 르카레의 소설 에스토니아어 번역본, 특정 판본의 앤 브론테 작품, 1983년 10월호 군함 전문 월간지가 함께 담겼다.
기계가 고른 듯한 목록, 불투명한 구매자
아일랜드 클레어갈웨이의 MW 북스 대표 짐 쇼너시는 5월부터 대량의 잡다한 주문을 받고 있다면서, 주문이 산발적이고 주제적 맥락이 거의 없어 기계가 고른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18세기 아프리카의 농기구에 관한 책부터 1950년대 카레이서 전기까지 뒤섞여 있다는 것이다. 영국 배스의 북러버스 오브 배스 대표 데이비드 가워스펜스는 5월부터 7월 사이 약 200권의 주문이 몰렸다고 밝혔다.
구매자의 정체는 드러나지 않는다. 익명을 요구한 한 영국 서적상은 서로 다른 구매자 명의로 들어온 주문이 같은 주소로 배송되는 경우가 있다고 전했다. 가디언이 확인한 한 배송지 우편번호는 히스로 공항 인근 화물 창고 단지를 가리킨다. 이 서적상은 1월 이후 유사한 구매자들로부터 6000권 규모의 주문을 받았으며, 대량 구매임에도 할인을 요구하지 않고 제값을 지불한다는 점이 이례적이라고 말했다. 거론되는 구매자 중 하나인 캐나다의 줌 북스(Zoom Books)는 스스로를 북미 최대의 도서 재활용 기업으로 소개하고 있다.
2025년 판결이 연 시장
이 호황의 기원은 법정에 있다. 작가 3인이 AI 기업 앤트로픽을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서, 미국 캘리포니아 북부지방법원의 윌리엄 알섭 판사는 2025년, 정당하게 구매한 실물 도서를 AI 모델 학습에 사용하는 것은 저작권법상 '변형적 이용'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구매한 책으로 학습하는 경로가 법적으로 열린 것이다.
지난달 법원 문서가 공개되면서 그 규모도 드러났다. 앤트로픽 내부에서 이 작업은 '파나마 프로젝트'로 불렸고, 문서에 따르면 목표는 세상의 모든 책을 파괴적으로 스캔하는 것이었다. 파괴적 스캐닝은 책을 대규모 디지털화 시설로 보내 제본을 뜯어내고 낱장을 고속으로 스캔한 뒤, 남은 종이를 재활용하는 방식을 말한다. 앤트로픽 대변인은 클로드가 공개 웹 데이터, 상업적으로 취득한 데이터셋, 자체 생성 데이터를 섞어 학습한다고 설명하면서, 도서 확보는 업계에서 널리 쓰이는 방식이며 자사의 어떤 데이터 취득 프로그램도 희귀본이나 고서를 사들여 파괴하지는 않는다고 밝혔다.
- 주문 규모: 한 서점은 1월 이후 6000권, 다른 서점은 5~7월에 약 200권
- 주문 성격: 주제·시대·언어가 뒤섞인 비정형 목록, 할인 요구 없음
- 법적 근거: 2025년 알섭 판사의 '변형적 이용' 판결(미국)
- 영국의 경우: 학습용 복제를 포함한 모든 복제에 저작권자의 사전 허가가 필요
국가마다 다른 법, 업계의 엇갈린 반응
법적 해석은 국경에서 갈린다. 미국 법원이 구매한 도서를 학습에 활용하는 방식을 허용한 반면, 영국은 학습용 라이브러리 구축을 포함한 모든 복제 행위에 대해 저작권자의 사전 허가를 엄격히 요구한다. 같은 책, 같은 목적, 다른 결론이다. 국내 출판·저작권 업계가 이 사안을 주시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데이터 확보 경쟁이 국경을 넘어 이뤄지는 이상, 어느 나라 법이 적용되는지가 곧 비용 구조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서점과 문화계의 반응은 반으로 갈린다. 수년간 팔리지 않던 재고가 소화된 것은 분명한 이득이다. 런던 북부 월든 북스의 데이비드 토빈은 오랫동안 팔리지 않던 책이 나가는 것은 반가운 일이지만, 그 책들이 결국 파기된다면 슬픈 일이라고 말했다. 난해한 라틴어 문헌부터 대중 소설까지, 다양하고 독특한 텍스트는 대규모 언어 모델의 성능을 끌어올리는 데 필수적인 자원으로 꼽힌다. 그러나 희귀 판본이나 역사적 가치가 있는 책까지 데이터 추출만을 목적으로 해체되는 상황에 대해서는 윤리적 우려가 이어지고 있다.
확인되지 않은 부분도 분명히 남는다. 서점들은 자신들의 책이 실제로 어느 AI 기업의 학습에 쓰이는지 알지 못하며, 맨리 역시 자신의 책이 파나마 프로젝트나 유사한 사업에 들어갔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고 말한다. 다만 그는 프로젝트 이름은 처음 듣지만 그 실체는 서적상 포럼에서 오래전부터 논의돼 왔다고 덧붙였다. 지금 시장에서 확실한 것은 하나뿐이다. 학습 데이터의 다음 전선은 웹이 아니라, 스캔된 적 없는 종이 위에 있다.
출처
- Secondhand book sales are booming. Is it because of AI?BBC News · 2026년 8월 15일
- Secondhand booksellers in UK and Ireland suspect AI firms behind 'strange' bulk ordersThe Guardian · 2026년 8월 15일
- “중고책 사들여 AI 마구 학습”… 중고 서적 시장, 때아닌 호황 배경은전자신문 · 2026년 8월 16일
